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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헌창에게 '공주(웅천주)'란? 반란의 시작과 끝 (김헌창의 난 Part.3)
    시사상식/역사 2023. 9. 6. 22:59

     

    반란의 전개와 결과

    1. 김헌창의 난과 '웅천주'

    3월에 웅천주(熊川州) 도독(都督) 헌창(憲昌)이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삼국사기 헌덕왕 14년(822)

    앞선 포스팅에서 살펴봤던 김헌창의 불만. 결국 김헌창은 헌덕왕 14년 웅천주(지금의 공주)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왜 하필 웅천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을까? 두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첫째. 웅천주 지역에서의 '김인문' 자손 김헌창의 영향력
     
    우리는 이번 김헌창의 난 포스팅의 Part1에서 김헌창의 직계 조상인 '김인문'이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란 것을 확인했다.
     
    잠시 시계를 돌려 삼국통일 시기로 가보자. 신라의 통일은 태종 무열왕 시기에 시작(660년 백제멸망)해서 문무왕(668년 고구려멸망) 때 마무리 된다. 당시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세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유신', '문무왕(당시 태자, 김법민)' 그리고 '김인문'이다.

    3월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김인문(金仁問)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130,000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삼국사기 태종 무열왕 7년(660)

    사료를 보면, 당나라가 인지하고 있는 나당연합군의 신라 측 대표는 '김인문'이다.
     
    백제 정벌과 고구려 정벌에서 엄청난 활약으로 당 황제도 인정했다. 통일 후 신라와 당나라 간의 신경전이 있었을 때 당나라는 신라의 왕을 '김인문'으로 삼으려고 할 정도였다.
     
    어쨌든 삼국통일에 김유신과 더불어 가장 큰 공을 세운 김인문에게는 식읍이 주어졌다. 이 받은 식읍이 바로 '웅천주'지방이다. 

    문무대왕은 인문의 영특한 재략과 용감한 공로가 보통의 예보다 뛰어났으므로, 죽은(故) 대각간(大角干) 박뉴(朴紐)의 식읍(食邑) 500호를 내렸다. 고종도 인문이 여러 차례의 전공(戰功)이 있음을 듣고서 제서(制書)를 내려, “용감하고 훌륭한 장수요, 문무(文武)에 뛰어난 재사이다. 작(爵)을 제정하고 봉읍을 주고 그 위에 아름다운 명을 내림이 마땅하겠다.”고 하였다. 인하여 작록과 식읍 2천 호를 더하였다. 그 후로 〔당의〕 궁궐에서 시위(侍衛)하기를 여러 해 동안 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김인문 (668년)

    때마침 왕자 흔(昕)은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며 산중(山中)의 재상(宰相)으로 불렸는데, 우연히 바라는 바가 합치되었다. (흔이) 말하기를 "스님과 나는 함께 용수(龍樹) 을찬(乙粲)을 조상으로 하고 있으니, 스님의 안팎으로 모두 용수(龍樹)의 자손입니다....중략
    지금 웅천주(熊川州) 서남쪽 모퉁이에 절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나의 조상인 임해공(臨海公){휘(諱)는 인문(仁問)
    이고, 당나라가 예맥(濊貊 : 고구려를 말함)을 정벌할 때에 공이 있어서 임해공(臨海公)으로 봉해졌다.}께서 
    봉토로 받은 곳입니다.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문

    식읍은 국가에 공을 세운 귀족들에게 주어지는 경제적 혜택이었다. 마을 단위나 호(집) 단위로 식읍이 설정되면, 그 식읍 지역에서 세금과 노동력 등을 징발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식읍은 원칙적으로 자손에게 세습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인문이 하사 받은 식읍이 자손인 김헌창에게까지 물렸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웅천주(공주) 지방은 어느 정도 김인문 후손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문의 김주원 증손자 '김흔'이 말하고 있는 내용에 주목해 보자.
     
    웅천주(공주) 지역이 김인문이 봉토로 받은 곳이라고 언급한다. 식읍의 세습까지는 사료만으론 확실치 않다. 하지만 '김인문의 봉토'를 언급하는 그 자체가 김인문의 당시까지 명성이 통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죽은 20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말이다.
     
    둘째. '웅천주'는 백제의 수도였다는 상징성이 있는 곳.
     
    삼국통일을 후 김인문이 받았던 '웅천주'의 식읍의 의미를 잠깐 다시 상기해 보자, 당시 백제의 전 수도인 '웅천주'라는 곳을 삼국통일 시기 신라 최고의 공을 세운 김인문에게 식읍으로 줬다.

    반대로 말하면 삼국통일기 최고의 공을 세운 정도가 아니면 하사할 수 없는 핵심 지역이었다. 즉, '웅천주'라는 곳은 백제 하면 딱 떠오르는 상징적인 곳이었다.
     
    그래서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킨 곳이 '웅천주'이기 때문에 '백제'와의 연관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백제지역의 차별로 인해 지역민들이 반란에 동조했다고 말한다. 이 차별은 사회, 경제 등에서 일어났을 것이다라고 막연히 이야기한다.
     
    차별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백제 최고의 핵심지역 '이었던' 웅천주. 이 과거형의 표현이 중요하다. 
     
    한 나라의 수도라는 것은 정치, 사회, 문화, 경제의 결정체를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다. 그 나라에서 최고로 좋은 것은 모두 수도에 있다.

    백제의 수도였고 핵심지역이었던 웅천주도 마찬가지였으랴. 지금도 서울사람이라는 게 은근한 자부심이 되는 것처럼, 웅천주의 지역민들도 최고 도시의 백성이라는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이후 옛 수도로서 받던 웅천주가 받던 혜택은 모두 사라졌다. 오히려 신라 입장에선 백제의 옛 수도라는 위험하고, 경계해야 할 도시가 되었다.

    663년에는 백제 부흥운동까지 있었다. 당연히 신라 정부에서는 옛 백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에 대해 압박과, 견제 그리고 통제를 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822년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났으니, 거의 16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신라의 '웅천주'에 대한 견제는 느슨해졌을지는 몰라도 지역민들의 감정은 쌓여왔을 것이다.


    2. 나라를 건국한 특이한 '반란'


    김헌창의 난은 굉장히 독특하다. 보통 반란이라면 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에 오르는 '쿠데타'를 말한다. 당시 어린 조카 애장왕을 살해하고 왕이 된 '김언승'의 예를 보더라도 그렇다.
     

    ... 반란을 일으켰는데,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만들어 경운(慶雲) 원년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헌덕왕 14년(822)

    단순한 반란이 아닌 나라를 세웠다. '장안'이라는 나라다. 심지어 연호까지 따로 만들었다. 단지 왕만 되길 원했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들이다. 그래서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짚어볼 것은 먼저 '나라 이름'이다. 국호를 장안(長安)으로 삼았다. 한자를 풀어보면, [길 장]과 [편안할 안]을 쓴다. 그렇다는 건 나라 이름은 '오랫동안 편안하다'라는 뜻이다.
     
    당시 신라가 '편안하지 하지 않았다'라는 반증일 것이다.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를 뺏기는 과정. 소성왕이 일찍 죽고, 애장왕이 살해당하고, 새 왕인 헌덕왕 때는 새로운 정치 실세들이 등장한다. 중앙정치가 굉장히 불안한 상태로 지속되었다는 점이 '장안'이라는 나라이름에서 드러난다.
     
    새 나라 이름에 또 다른 의미가 숨어있다. 그것도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바로 당시 '당나라'의 수도가 '장안'이었기 때문이다. 이 나라 이름에 김헌창이 직접 의미를 설명한 적은 없다. 하지만 신라에 반대하는 나라를 건국하면서도, 친(親) 당나라의 기조를 세운게 아니었을까 추측을 하게 한다.
     
    이건 아마 '김인문'이라는 조상과도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김인문은 당나라에 굉장한 신뢰를 받았다. 삼국통일 후 당나라가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압박을 주는 과정에서 문무왕 14년(674)에는 당나라가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삼고 파견하기도 한다.
     
    김인문의 후손인 김헌창이 당나라에 인정받기 위해 김인문의 명성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두 번째 짚어볼 것은 '자주적인 연호'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독자적인 연호는 곧 신라와는 다른 자주적인 나라를 세우겠다는 의지 표명과도 같다.

    하지만 연호만 두고 봐서는 당나라, 신라 두 나라 어느 쪽에서 독립되고 싶은지 불분명하다. 나라 이름을 굳이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한 점을 고려해 본다면, 당나라보다는 신라에 독립하고 싶은 의지가 아니었을까.
     

    "웅천주라는 지역" : 김인문(무열왕계)의 영향력이 잔존한 지역이면서도 신라에 반감이 있는 곳. 즉, 웅천주 = 친 무열왕계(현 웅천주 도독) + 반 내물왕계(현 신라정부) 지역

    "장안이라는 나라 이름" : 당나라에 신뢰받던 김인문(무열왕계)의 명성 활용

    "독자적인 연호" : 당시 내물왕계의 왕이 이끄는 신라와 차별화되는 나라

     
    모든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 김헌창의 새로운 나라 '장안'은 내물왕계 신라와 차별되는 '무열왕계' 왕이 다스리는 나라다.

    나라를 세운 특이한 반란은 후삼국 시대 때 본보기가 된다. 궁예의 후고구려, 견훤의 후백제는 지방을 거점으로 나라를 세운다.
     


    3. 어느 정도 준비된 반란이었을까


    김헌창의 난은 치밀한 준비가 있었을까? 나라이름이나, 연호까지 준비한 것을 볼 때 분명 준비가 된 반란이다. 나라를 세울 정도의 반란이라면 조직화된 '군대'까지 준비했음을 의미한다.
     
    또 주목해 볼 만한 점이 있다. 김헌창의 난은 통일신라에서 지방을 거점으로 해서 일으킨 최초의 대규모 반란이다.

    그렇다는 건 '지역민들'과 '타지방'의 호응이 중요했다. 이들을 잘 포섭해야 중앙의 정규군에 대응할 '군대'를 조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신라의 지방행정체계가 9주 5소경이었다.

    김헌창의 난에는 4개의 주(洲) 및 3개의 소경(小京)이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 무진주(武珍州), 완산주(完山州), 청주(菁州), 사벌주(沙伐州)  네 주의 도독과 국원경(國原京), 서원경(西原京), 금관경(金官京)의 사신(仕臣) 및 여러 군현(郡縣)의 수령(守令)들을 위협하여 자신의 아래에 예속시켰다.

    삼국사기 헌덕왕 14년(822)

    그렇다는 건 신라 땅 절반이상이 김헌창의 반란에 동조했음을 의미한다.

    이때 '명주'도 아버지 김주원의 세력권임을 고려했을 때 김헌창의 난에 동조하지 않았더라도 신라정부 편은 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9주 5소경에서 5주 3경이 반란에 동조했다. (또 명주는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의 세력권이다)



    내물왕계가 왕위를 잇고 난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반란이었다. 더 넓게 보면 나당전쟁 이후 최대의 국가적 위기였다.

    지도만 봐도 당시 내물왕계 신라정부의 당혹스러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신라정부에게도 희망은 있었다. 반란 준비에 필요한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김헌창이 웅천주 도독이 된 것은 헌덕왕 13년 3월이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것은 헌덕왕 14년 3월이다.

    딱 1년이라는 시간이다. 그 짧은 시간에 잘 짜여진 나라를 만들긴 어려웠을 시간이다. 부족한 준비는 반란 과정에서도 잘 나타난다.

    ... 청주 도독 향영(向榮)은 몸을 빼 추화군(推火郡)으로 달아났고, 한산주(漢山州), 우두주(牛頭州), 삽량주(歃良州), 패강진(浿江鎭), 북원경(北原京) 등은 김헌창의 역모를 미리 알고 병사를 동원하여 스스로를 지켰다.

    삼국사기 헌덕왕 14년(822)

    이미 동조하기로 한 청주는 발을 뺐다.

    그리고 고구려의 옛 지역에 설치된 한산주를 포섭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포스팅에서 검토한 내용을 보면 옛 백제 지역의 분노도 하나의 반란 명분이었다. 비슷한 명분이 있는 옛 고구려 지역 '한산주' 포섭에 실패한 것은 명백한 반란준비 부족이다.
     
    '역모를 미리 알고'라는 표현도 주목할 만한다. 반란 기밀이 쉽게 노출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반면, 준비 과정에서 미리 여러 지역에 포섭 의사를 사전에 확인했다는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이때는 반란 명분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4. 반란의 진압


    부족한 준비는 반란의 규모에 비해 떨어지는 일체감을 보여준다. 특히 난의 진압과정을 보면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이 때에 헌창은 장수를 보내 주요한 도로를 차지하고 〔신라군을〕 기다렸다. 장웅이 도동현(道冬峴)에서 반란군[賊兵]을 만나 공격해 패퇴시켰고, 위공과 제릉은 장웅 군대에 합류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을 공격해 들어가 이겼다. 군대를 속리산(俗離山)으로 진격시켜 반란군을 쳐 궤멸시켰으며, 균정 등은 반란군과 성산(星山)에서 싸워 이를 궤멸시켰다. 여러 군대가 모두 웅진(熊津)에 도착하여 반란군과 크게 싸웠는데...

    삼국사기 

    중앙군과 반란군과의 전투를 보면 뭔가 좀 이상하다.

    보통의 반란군이라면 반란 주동자인 김헌창이 주력군을 이끌고 나가지 않는가? 적극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반란군과 신라 정부군의 전투는 도동현, 삼년산성, 성산, 웅진성 등 몇 군데에서만 벌어졌다.

    이를 보면 반란군은 각 지역에서 따로따로 봉기한 통일되지 못한 세력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력군도 웅진성에서만 머무를 뿐이었다.



    전반적으로 반란군은 조직적이지 못했고 분산적이었다.

    반면 주목되는 건 신라 중앙정부의 대처다. 빠르게 반란을 보고 받고, 주요 왕족으로 하여금 먼저 수도 방비 체계를 갖춘다. 그 후 곧바로 진압군을 구성하고 여러 루트로 신속하게 반란군 핵심지역으로 진군한다.

    마치 짜여진 각본을 보는 듯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통일신라 하대의 시기는 혼란한 시기다. 왕위쟁탈전이 지속되던 신라 중앙정부는 지방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는 게 기존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김헌창의 난까지 중앙정부는 지방을 통제할 수 있는 조직력을 갖췄음을 보여준다.

    물론 김헌창의 난이 미리 발각되어 중앙의 귀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크다. 어찌 되었건 신라 중앙정부는 통일신라 명운이 걸린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다.


    신라의 명운이 걸린 대규모 반란이었던 '김헌창의 난'. 진압은 생각보다 빠르고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반란의 에피소드와 의의는 어떤 게 있을까. '반란'임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살아남는 특이한 행보를 볼 수 있는데, 다음 포스팅에서는 그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김헌창의 난'을 마무리 지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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