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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헌창의 난 의의와 한계 & 에피소드 (김헌창의 난 Part.4)
    시사상식/역사 2023. 9. 7. 11:38

    '김헌창의 난' 에피소드

    1. 관련자 처벌

    전국을 뒤집어 놓은 대규모 반란의 진압 후 처벌은 어땠을까. 엄청난 피바람이 불어야 맞지 않을까. 흥미롭게도 김헌창의 난은 달랐다. 주모자인 김헌창은 자살해 처벌을 받지 못했다. 대신 그의 친척과 따르던 무리 239명을 죽였다고 한다. 이 정도는 '반란' 실패에 따른 당연한 결과다.

    여러 군대가 모두 웅진(熊津)에 도착하여 반란군과 크게 싸웠는데, 목을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군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헌창이 겨우 몸을 피하여 성안에 들어가 수비를 견고히 하자, 여러 군대가 성을 포위하여 공격한 지 10일 만에 성이 막 함락되려 하였다. 헌창이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자, 종자(從者)가 목을 베어 머리와 몸을 각각 다른 곳에 묻었다. 성이 함락되자 오래된 무덤[古塚]에 있던 그의 시신을 찾아내 다시 처단하고, 친척[宗族]과 따르던 무리[黨與] 모두 239명을 죽였으며, 그 백성들은 풀어 주었다.

    삼국사기 헌덕왕 14년(822)

    주목할 것은 ' 백성들은 풀어주었다'는 점이다. 참여자 모두를 죽일 수는 없더라도, 참여한 백성들을 충분히 죽일 수도 있는데 용서한다. 이를 보고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백제' 유민의 원한을 사지 않기 위해. 충분히 일리가 있다. part3에서 살펴보았을 때, 웅천주의 특성이 백제의 전 수도라는 점도 반란의 하나의 요인이었다. 백제 유민에 회유의 손길을 내미는 하나의 시그널일 가능성이 있다.
     
    둘째, 내물왕계 '신라 정부'의 여유. 김헌창의 난으로 지금까지 걱정이었던 왕위의 정통성 문제를 단번에 해결했다.

    김헌창의 난이 '무열왕계' vs '내물왕계'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무열왕계는 반란이 일으킴으로써 내물왕계를 인정하지 못한 셈이 되었고, 그 싸움에서 이긴 '내물왕계'는 왕위의 절대적 명분을 챙겼다. 즉, 무열왕계의 KO패배였다. 국정 운영에 한결 여유가 생긴 신라 정부. 이 여유를 관련자 처벌에서 볼 수 있는 게 아니었을까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2. 살아남은 김헌창의 가족

     
    분명 김헌창의 난 관련자 처벌에는 '친척과 따르던 무리 모두 239명을 죽였으며..'라는 표현을 통해, 가족들의 연좌제 처벌이 이뤄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의 신라 역사를 보면 굉장히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있다. 바로 무열왕계 자손들이 이후 역사에서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왕위쟁탈전에 핵심 역할을 맡는다.
     

     
    아마 김헌창의 난에 그의 형인 김종기는 명주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의 자손들인 '김흔'과 '김양'이 이후 신라왕위계승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습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 김흔은 44대 민애왕 시기의 대장군으로 이른바 달벌전투에 참가했다. 김양은 첫 왕위쟁탈전에 '김균정'을 지지했으나 패하고, 청해진의 장보고와 심기일전해 사촌형 김흔이 이끄는 정부군에 승리한다. 지지하던 '김우징'을 옹립했다. 이가 신문왕이다. 죽은 후에는 '김유신'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는데, '왕'급으로 대우한 것이다.
     
    왜 김헌창의 난이라는 대역죄에도 가족을 향한 처벌이 없었을까?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법하다.
     
    첫째, 신라 정부가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다. 김헌창의 난 전까지 '무열왕계'에 비해 정통성이 떨어졌다. 내물왕계가 왕위에 오른 지 4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무열왕계'의 반란에 신라 국토 반 이상이 참여한 데서 충분히 짐작가능하다. 김헌창의 난의 압도적인 정부의 승리는 내물왕계의 왕위 계승 정통성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또, 김헌창의 난의 패배로 '무열왕계'는 다시 왕위에 도전할 수 없는 큰 타격을 입었다. 그렇기에 굳이 신라정부로써는 능력 있는 '무열왕계'를 처벌할 이유는 없었다.
     
    둘째, 김헌창의 난 이후에 정말 가족들의 처벌이 있었을지도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도 반란(김범문의 난)을 일으킨다면서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무려 김헌창의 난 3년이 지난 시점이다. 관련자 처벌 때 가족을 처벌했다면 아들을 처벌하지 않았을 리 없다.

     

    17년(825) 봄 정월에 헌창(憲昌)의 아들 범문(梵文)이 고달산(高達山)의 도적 수신(壽神) 등 100여 명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였다. 평양(平壤)에 도읍하고자 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를 공격하였는데, 도독(都督) 총명(聰明)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싸워〕 그를 잡아 죽였다 
    * 평양은 지금의 양주(楊州)이다. 〔고려〕 태조가 지은 장의사(㽵義寺) 재문(齋文)에, “고구려[高麗]의 옛 땅, 평양의 명산”이라는 구절이 있다.

    헌덕왕 17년(825)

     

    반란이 3년이나 지난 시점까지 아들이 생존해 있었다는 건, 정말 신라 정부가 김헌창의 가족을 처벌하였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신라정부의 여유라고 생각한다면 납득은 된다.


    3. ‘김헌창의 난’ 의의

    의의 1. 무열왕계의 카운터 펀치

    신라 전국토의 반이상을 자기편으로 만든 '김헌창'. 그만큼 신라 정부의 정통성이 취약했다는 증거였다.

    김헌창의 난을 압도적으로 진압한 신라 정부는 완벽한 정통성을 얻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무열왕계'가 왕위에 도전할 수 없는 큰 타격을 입혔다. 무열왕계는 카운터 펀치를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의의 2. 후삼국시대 미리보기

    위 사진이 서로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땅' 뿐만 아니다. 김헌창의 난은 '지방'을 거점으로 일으킨 첫 스타트다. 또 '나라'를 건국한 특이한 반란이었다. 그리고 백제 지방의 차별을 명분 삼아 일으킨 반란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념' 또한 후삼국과 매우 흡사하다.

    하지만 김헌창의 난이 후삼국 성립에 '직접' 영향을 줬다거나 기폭제가 되었다고 보기엔 어렵다. 왜냐면 김헌창의 난이 822년이고, 후삼국의 시작을 알린 후백제 건국이 900년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격차가 78년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약 80년 정도라면 후손들에게 그 뜻은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 우리도 1950년의 6.25 전쟁을  70년의 세월을 뛰어넘고 기억하는 것과 같다.

    후삼국의 후배들은 김헌창을 본보기 삼았고, 신라 정부는 왕위계승의 극심한 혼동으로 쇠락했다. 반란의 세력은 학습을 통해 더 강해졌는데, 통제세력이 약해졌다면 뻔한 결과 일 수밖에 없다. 후삼국은 그렇게 등장하게 된다.


    의의 3. 중앙정부의 통제력 확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나라의 반이 갈리는 대규모의 반란은 전례가 없었다. 이는 통일 신라 국가운영 시스템의 운명을 쥔 시험대라고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중앙과 지방이 대결하는 모양새로 보이기도 한다. 신라 정부의 완벽한 승리는 아직 강력한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나라의 절반이 반란에 참여한 모습은 한쪽에 치우친 수도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한 9주 5소경 제도의 불완전성을 입증하기도 한다. 중앙에서 완벽한 통제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빠르고 확실한 반란 진압을 생각해 보면. 중앙이 9주 5소경 시스템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충분했음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리해 보면 이 한 번의 승리로 신라정부는 100년 넘게 더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했다고 할 수 있겠다.


    4. ‘김헌창의 난’ 한계

    한계 1. 세상을 바꾸기엔 아직 부족한 힘

    김헌창의 난은 여러 의의만큼 분명한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김헌창은 훗날 후삼국시대의 호족세력들만큼의 힘은 없었다. 무력과 더불어 이념을 뒷받침하던 지지세력 6두품 같은 존재도 없었다. 아직 새로운 세상을 여는데 힘이 부족했던 것이다.


    한계 2. 본격적인 신라왕위계승 혼란

    김헌창의 난으로 '무열왕계'라는 큰 적이 제거되자, 내물왕계의 왕실 내부에서 왕위계승 쟁탈전이 펼쳐진다. 세력 균형이 무너지면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다.

    이는 중앙정부의 통제력 약화를 불러오고, 지방 호족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한계 3. 신라정부의 재발 방지 대책 無

    우리는 약 80년 후 후삼국 시대가 펼쳐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알 방도는 없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분명하다.

    후삼국의 나라들이 김헌창의 난과 동일한 성격이라는 점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지방에 대한 적절한 통제와 융화책, 백성에 대한 차별 완화책 등 국가를 정비하는 개혁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다.

    하지만 개혁이 있었더라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진성여왕시기 민란이 들끌었을 때, 당대 최고 엘리트 최치원이 개혁을 위한 시무책을 제기한건 잘 알려져 있다. 당나라에서도 최고라고 손꼽던 세계적 인재인 최치원도 '6두품'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산속으로 들어가 은거하며 말년을 보냈다. 결국 '신라'라는 국가시스템은 한계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김헌창의 난으로 부족한 점을 파악하고 개혁을 했다 하더라도, 사회의 틀 전체를 부수지 못하는 한 그 개혁도 미봉책으로 그쳤을 것이다.


    긴 포스팅이었다. 우리 대부분은 시험 문제의 출제여부로 역사의 중요성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김헌창의 난은 한국사 시험 문제로 딱 한 문제 나올까 말까 한 주제다. 하지만 시험의 출제 빈도로만 역사를 판단해선 안된다. 김헌창의 난은 통일신라 하대의 역사의 방향키를 쥐었던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 '반란'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었다.

    이후 세상에 엄청난 파급력을 주었다. 무열왕계는 힘을 완전히 잃고, 내물왕계가 독차지한 정권은 내부에서 왕위계승쟁탈이 펼쳐졌다. 지방의 힘은 더 거세졌고, 실패한 김헌창의 난은 성공한 후삼국을 만드는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는 점에서, '김헌창의 난'이 후삼국 시대로 향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는 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 포스팅은 아직 미정이지만 왕위쟁탈이나 후삼국 분야를 다뤄보면 재밌을 것 같다. 김헌창의 난을 알고 신라왕위쟁탈전, 후삼국시기를 공부한다면 더 의미가 살아날 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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