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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당계보로 보는 정치인

현대판 사자성어 내로남불 뜻은? 1호 공식 사용자 박희태 국회의장 정당 계보와 함께 알아보기

by Cheeeeeeese 2025. 6. 21.

국회의장 박희태 정치 행보 및 정당계보

✦ 박희태 편 ✦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냐.”


요즘도 댓글창에서 흔히 보이는 현대판 사자성어 ‘내로남불’의 1호 공식 사용자. 박희태.

 

박희태가 이 표현을 언급했을 당시에는 가볍게 들렸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며 정치권은 물론 일상 속에서도 이 문장을 반복적으로 소환하게 되었다. 언행 불일치나 이중잣대가 언급될 때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떠올렸고, 점차 정치와 사회 풍자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정치9단이라는 별명, ‘총체적 난국’이라는 유행어도 박희태 언어에서 시작됐다. 박희태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국회의장, 한나라당 대표, 이명박 당선의 숨은 조력자—그리고 공직 이후에도 여러 논란으로 회자된 인물이다.

 

왜 박희태인가. 지금 다시 조명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박희태가 지나간 정당 계보 속엔 한국 보수 정치가 지나온 길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 검사에서 정치인으로, 촌철살인 대변인

1988년, 민주정의당 후보로 정계에 입문했다. 서울법대 졸업과 사법시험 합격, 대검 공판송무부장과 부산고검장 등 요직을 거친 검사 출신으로, 검찰총장 후보군으로도 거론될 정도의 경력을 갖고 있었다.

 

정치권에선 이러한 이력을 바탕으로 보수정당 내 주요 계보를 따라 활동하게 된다. 민주정의당을 시작으로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까지 전통 보수정당의 흐름을 충실히 따르며, 이후 당과 의회 내 중책을 맡는 데에도 이 경력이 뒷받침이 되었다.

 

정치권 내에서 단번에 눈에 띈 계기는 언변이었다. 1990년대, 당시 경제부총리 이승윤이 언급한 'Total Crisis'라는 표현을 ‘총체적 난국’으로 번역하며 대변인으로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표현은 이후 언론과 대중문화 속에서 위기 상황을 압축하는 상징어처럼 자리잡았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발언이다. 해당 표현은 이후 '내로남불'이라는 신조어로 압축되며 정치권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널리 쓰이는 풍자 표현으로 자리잡았다. 해당 표현은 공식 석상에서 박희태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내로남불'이라는 줄임말로 퍼지면서 정치권과 사회 전반에서 널리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정치 9단 : 1989년 박희태가 민정당 대변인 시절, 5공 청산을 둘러싼 여야 영수회담을 앞두고 “대통령과 세 분 총재는 모두 정치 9단으로서 입신의 경지에 있다”고 기자들에게 언급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이 표현이 널리 알려짐

내로남불 :
1996년 15대 총선 직후 당시 여소야대 상황에서 여당(신한국당)의 ‘의원 빼가기’와 관련해 야당(새정치국민회의)이 맹공을 퍼붓자 처음 공식석상에서 발언함. 야당의 주장은 내가 바람을 피우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 내가 부동산을 사면 투자고 남이 구입하면 투기라는 식” 
  다만 처음부터 "내로남불"이란 조어 형태로 사용된 건 아님. 또한 초반에는 ‘불륜’ 대신 ‘스캔들’을 활용해 ‘남이 하면 스캔들, 내가 하면 로맨스’의 형태로 주로 쓰였음.

총체적 난국
: 1990년대 경제위기 당시 이승윤 경제부총리가 ‘Total Crisis’라는 영어 표현을 사용했고, 이를 집권 민주자유당 대변인이었던 박희태 의원이 ‘총체적 난국’으로 번역해 공식적으로 사용하면서 이 표현이 세간에 널리 퍼지기 시작

 

 

 

2. 대표최고위원에서 국회의장까지

2007년 대선 당시엔 이명박 캠프의 핵심이었다. BBK 의혹이 휘몰아칠 때, 방어 논리를 제공하고 수습책을 짠 것도 박희태였다.

 

이명박 당선 후, 여권의 구심점이 필요했다. 공천 탈락 이후에도 박희태를 다시 불러들인 것은 친이계의 집결. 2008년 전당대회에서 친이계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한나라당 대표(대표최고위원)에 오른다. 

 

당시 캠프는 대선 캠프와 거의 동일한 구성. 정몽준을 누른 뒤 청와대와 가교 역할을 맡았지만, 인터뷰에서는 “대통령에게도 할 말은 하겠다”고 공언했다. 이 시기 언론 일부에서는 박희태를 '정치 9단'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표현은 본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상징하던 정치적 수사였지만, 박희태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용했던 이 표현은 훗날 박희태에게도 쓰일 만큼, 그만큼 유연한 정치력을 보였다는 평가도 뒤따랐다.

 

3. 명예직 국회의장의 불명예 퇴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여당 내 구심점이 필요하던 시기였다. 박희태는 한나라당 대표를 거치며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고, 오랜 의정 경험과 당내 계보에서의 균형 잡힌 입지 덕분에 국회의장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국회의장은 관례적으로 5선 이상의 중진 의원 가운데 선출되며, 다수당 소속이면서도 국회의원 전체의 신망을 두루 받아야 하는 명예직이다. 여당의 지지, 야당의 수용, 의회 경험 모두가 필요하다. 그런 자리까지 올랐다는 것은 정치적 실력뿐 아니라 계보 내 입지와 조정 능력까지 입증된 셈이었다.

 

결국 박희태는 제18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2010~2012년)으로 선출되며, 정치 인생의 정점에 올라섰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이던 그때, 2012년 갑작스런 폭로가 정치권을 뒤흔들었다. 고승덕 의원이 2008년 전당대회와 관련해 박희태 측으로부터 금품이 전달됐다고 주장한 것이다. 고 의원은 "자신의 의원실로 전달된 봉투 안에 박희태 명함이 함께 들어 있었다"고 주장했으며, 이 발언은 곧바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검찰은 수사에 착수했고,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처음에는 혐의를 부인했으나, 이후 “집안 잔치 같은 분위기에서의 관행”이라는 표현으로 입장을 일부 조정했다. 이후 정당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며, 2012년 2월 국회의장직에서 사임한 뒤 제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4. 또 다른 논란과 정치적 퇴장

하지만 국회의장에서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2014년 강원도 원주의 골프장에서 또 한 차례 논란이 불거졌다. 가까운 시기의 연속된 상황이었던 만큼, 사회적 반향도 클 수밖에 없었다. 당시 박희태는 "손녀 같아서 귀엽다는 표시는 했지만, 정도를 넘지는 않았다"는 해명을 내놓았고, 이 언행은 사회적 비판을 받았다.

 

결국 재판에 이르게 되었고, 2015년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며 형사처벌 이력이 남으며, 국회의장의 혜택인 국립묘지 안장 자격도 박탈되었다.

 

해당 사건은 정치적 부담으로 이어졌고, 새누리당에서도 제명 조치가 내려졌다. 돈봉투 논란과 더불어 두 건의 형사처벌 전력은 정당 차원에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안이었다. 이 시점 이후 박희태는 사실상 정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결론

내로남불, 정치 9단, 총체적 난국. 박희태라는 이름은 정치권 안팎에서 언어와 이미지로도 오래 회자되고 있다.

 

검찰 고위직을 거쳐 민주정의당에서 정계에 입문한 후,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에 이르기까지 전통 보수정당 계열의 흐름을 따라간 인물로, 각 시기마다 당내 주요 고비에서 연결고리로 작용해 왔다.

 

법제사법위원장, 한나라당 대표, 국회의장 등 입법부와 당을 아우르는 중책을 맡았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조율과 갈등 완화를 도모했다는 분석도 있다.

 

정당 계보를 따라가 보면 박희태의 존재감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유행어처럼 자리 잡은 여러 표현이 그의 정치 커리어와 함께 얽히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물론 뚜렷했던 정치적 족적만큼, 비판과 논란도 일부 동반되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이 모든 요소가 오늘날 보수정당의 흐름을 짚는 데 하나의 실마리가 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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