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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정당계보로 보는 정치인

‘피닉제’ 이인제의 당적 이동사, 정당 이력으로 정치 지형 알아보기

by Cheeeeeeese 2025. 6. 22.

‘피닉제’ 이인제의 당적 이동사

✦ 이인제 편 ✦

이인제는 왜 '피닉제'라 불렸을까? 충청남도 논산을 기반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인제는, 당적 변경만 18번. 경선 불복, 신당 창당, 복귀와 탈당을 반복하며 한국 정치의 ‘불사조’로 불렸다.

 

1997년 대선에선 정당도 조직도 없이 19.2%를 득표했고, 논산과 금산을 중심으로 지역 몰표로 수차례 역전극을 만들어냈다. 누군가는 ‘철새’라 조롱했지만, 또 다른 이는 ‘생존 전략가’라 평했다.

 

오늘은 이인제의 정치 여정을 인포그래픽과 글로 살펴볼까한다. 그 안에 숨겨진 전략의 문법을 함께 살펴보자.

 

◎ 인포그래피는 본문 2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빠르게 확인하고 싶으시면 스크롤을 내려주세요~

 

1. 이인제의 정계 입문 : YS

1987년. 김영삼의 소개로 정계에 입문한 이인제는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초선 의원 시절, 이인제는 노무현, 이해찬과 함께 '5공 청문회 스타 3인방' 중 하나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1990년 1월, 3당 합당이 단행되자 김영삼을 따라 민주자유당에 남는다. 당시 보스 정치가 팽배했고 초선 의원으로서 선택권은 제한적이었지만, 노무현처럼 탈당을 감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인제는 결국 김영삼의 선택을 따랐다. 스스로 판단했다기보다는, 정치의 흐름에 휩쓸린 쪽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이인제의 결정은 단순한 줄서기였을까, 아니면 살아남기 위한 현실적 판단이었을까?

 

2. 대권 도전과 이인제 방지법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만 45세의 최연소 노동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고용보험제도를 최초로 도입했고, 산업현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발로 뛰는 장관'의 모범을 보여줬다.

 

과거 노동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변호사 시절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결과였다. 이런 활동 덕분에 국민적 호감을 얻었고, 1995년 6월 국회의원직을 내려놓고 경기도지사 선거에 나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여유롭게 당선됐다.

 

이후 이인제는 신한국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급부상하며 1997년 대선 경선에 도전한다. 이회창의 압도적 기세에도 불구하고 결선 투표까지 밀어붙였고, 결국 패배했지만 지지 기반은 무너지지 않았다.

 

같은 해 9월 13일, 경선 불복을 선언하고 신한국당을 탈당해 국민신당을 창당, 독자 출마를 강행한다. 단순한 불복이었을까? 아니면 김영삼의 묵인 아래 이회창을 견제하기 위한 카드였을까? 당시 김영삼과 이회창의 관계는 좋지 않았고, 이인제를 은근히 부추겼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제15대 대선 결과, 이인제는 19.2%를 얻으며 3위에 올랐다. 정당의 지역 기반 없이 오직 '이인제'라는 이름만으로 기록한 성적이었다.

 

이는 이후 이인제가 전국구 정치인으로 부상하게 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경선 불복 행보는 훗날 선거법 개정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이인제 방지법'이라 불리는 조항은 2004년 총선 이후 논의되어 2007년 공직선거법에 반영되었다.

 

이인제_당적
 

 

3. 생존 전략 : 끝없는 당적 변경 

이후 새정치국민회의,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국민중심당, 민주당, 통합민주당, 자유선진당, 새누리당… 이인제는 무려 18번의 당적 변경을 기록했다.

 

사람들은 조롱했다. “철새.” ‘피닉제’라는 별명은 이인제를 조롱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생명력을 인정하는 말이기도 했다. 놀라운 건 이인제가 그때마다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제17대부터 19대까지, 공천 탈락이든 여론조사 열세든 이인제는 무소속 출마로 극복했고, 금산군 등 지역 기반에서 몰표를 얻어 역전승을 만들었다.

 

‘리틀 박정희’를 자처하며 보수층을 겨냥하기도 했고, 충청의 대변자로서 지역 세력을 결집할 때도 있었으며, 색깔론까지 불사한 강성 캠페인으로 존재감을 키우기도 했다. 정당을 떠돌았지만, 불사조라는 별명답게 이인제의 전략은 다양했다.

 

4. “불사조” 전략의 평가는?

이인제는 선거판을 뒤흔들었다. 1997년, 신한국당 경선에서 패배한 뒤 불복하고 독자 출마해 보수 진영의 표를 갈라 김대중 당선의 1등 공신이 되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이 경선 불복 사건은 훗날 '이인제 방지법'으로 불리는 공직선거법 개정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경선 제도의 취지를 무너뜨렸다는 평가가 따랐다.

 

이후 이인제는 자유민주연합, 민주당, 국민중심당, 통합민주당, 자유선진당 등 다양한 정당을 거치며 민주당과 보수당을 넘나들기도 하고, 충청 기반의 지역 정치를 이어가기도 했다. 탈당과 복당을 거듭하며, 정당이 바뀔 때마다 이인제의 이름도 명단에 올랐다. 2012년엔 새누리당에 복당했고, 2014년에는 최고위원으로 선출되며 친박 진영의 ‘신박’으로 자리매김했다.

 

보수에서 민주당계를 거쳐 다시 보수로 돌아온 이력. 탈당과 복당을 반복한 이인제를, 대중은 그저 전략으로만 받아들였을까?

결론

이인제는 늘 패배 직후 움직였다. 경선에서 밀리면 탈당했고, 공천을 받지 못하면 다른 길을 찾았다. 신당을 만들고, 타이밍을 노려 복귀했다. 누군가는 그걸 배신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감각이라 평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인제 방지법'이 생기며, 경선 패배 후 곧장 출마하는 길은 막혔다. 유권자 역시 과거처럼 관대하지 않다. 거대 정당이 인물을 고르는 시대다. 이젠 탈당과 독자 출마로 기회를 노리는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만약 과거의 이인제가 지금 정치를 시작했다면, 그 생존 전략은 과연 통했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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