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탄핵 사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뇌리에 남는 장면이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이름, 조순형.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아마 두 개의 감정을 품고 있을 것이다.
조순형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민주당을 지키려다 스스로를 고립시킨 사람? 아니면 권력의 균형추를 쥐고 있던 실용주의 정치인?
지금 다시 조순형을 꺼내 드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의 선택들이 결국 오늘날 보수와 진보의 분화 흐름 속에 어떤 뿌리를 남겼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다.
특히, 정당을 수차례 옮기며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었던 그의 행보는 단순한 '철새'로 보기엔 그의 정당 이동에는 시대적 맥락과 정치적 판단이 깊이 얽혀 있었다. 그가 걸어온 길, 그 길 위에서 이 나라 정치가 얼마나 요동쳤는지를 다시 들여다볼 때다.
1. 무소속의 시작, 민주화의 흐름
1980년 서울 성북구. 신군부에 의해 국회가 해산되고 형 조윤형이 정치규제를 받자, 그 공백을 채운 이름이 조순형이었다.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나 서울 지역 무소속 중 유일한 승리자였고, 그 자체로 시대의 흐름과 맞닿아 있었다.
신민당 해산의 유산, 아버지 조병옥의 이름값, 그리고 삼성 출신 기업인의 이미지를 등에 업은 그는 곧바로 민주화추진협의회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의 정치 입문은 계획된 것이 아니라 시대가 만든 것이었다.
신군부 시절 야권의 결속은 외부 압력 앞에 한목소리를 냈지만, 1987년 민주화 선언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민주화 세력 내부에서도 리더십과 전략을 두고 갈등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 흐름은 자연스레 조순형을 양김 분열의 중심으로 이끌었다.
김영삼과 김대중 두 인물 사이에서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조순형은 정치 노선과 정체성을 둘러싼 이 선택의 기로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계파와 노선을 결정해야 했다.

2. 양김 분열과 동교동계 핵심
1987년, 야권 분열의 시기.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화를 요구하며 삭발 농성을 감행했지만, 정작 결과는 실패였다. 단일화 무산 이후, 김영삼이 주도한 통일민주당은 조순형에게 더 이상 선택지로 남지 않았다. 그는 야권 내 새로운 진영 형성을 주시했고, 한겨레민주당을 거쳐 결국 꼬마민주당이라 불린 민주당에 합류했다. 이후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의 통합 과정에서 중심 세력으로 부상한다.
당시 야권 내 세력 분화는 단순한 계파 갈등을 넘어, 정치적 정체성의 재구성이라는 큰 물줄기였다. 조순형은 김대중이 주도하는 흐름, 즉 동교동계로 이동하게 된다. 동교동계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으로, 민주화 이후 진보 성향 정당의 중추를 이루었다. 조순형은 이 계보에 자연스레 스며들었고, 이후 핵심 인물로 떠오른다.
그가 단지 같은 당적에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버지 조병옥과의 연결고리, 민주화 세력에 대한 일관된 태도, 그리고 현실정치에 강한 감각을 갖춘 인물로 동료 의원들과 언론의 평가를 받으며 입지를 굳혔다.
그는 이철, 예춘호, 박찬종 등과 함께 삭발 농성에 나섰던 인연도 있지만, 이들이 모두 동교동계 핵심으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유인태는 실무형 인물로 통합 성향 진보 정치인으로 더 자주 언급된다. 조순형만이 동교동계 중진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그의 정당 선택은 단순한 기회주의가 아니라, '김대중의 길'에 동의하는 정치적 태도의 표현에 가까웠다.
그러나 동교동계의 내부 균열과 당의 변화를 지켜보며, 그는 또 한 번의 선택을 앞두게 된다. 새로운 리더십이 떠오르고, 조순형은 중심에 설 기회를 얻게 된다.
3.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그리고 탄핵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하며 선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던 조순형. 하지만 1년 뒤, 열린우리당 창당에는 끝까지 반대했다. 이는 단지 계파 갈등이 아니었다. 조순형은 열린우리당 창당이 기존 당의 정통성과 체계를 무너뜨리는 무리수라고 봤다. 동교동계 분열 속에서도 그는 새천년민주당에 잔류했고, 결국 대표직을 맡는다. 그 직책은 그에게 무거운 결정을 요구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발의됐다. 조순형은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표로서 탄핵안에 찬성했고, 그 주도자로 지목됐다. 표면적으로는 ‘측근 비리’와 ‘선거 중립 의무 위반’이 명분이었지만, 정작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공개 석상에서 열린우리당을 개혁 세력으로, 민주당을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처럼 언급한 것이었다.
그 발언은 잔류 민주당 인사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조순형 입장에선 당 대표로서 그 발언을 방관할 수 없었다. 그는 국회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했지만, 대중은 이를 정략적 행위로 받아들였다.
국회는 찬반토론 없이 표결에 들어갔고, 결과는 가결. 하지만 역풍은 거셌다. 민주당은 국민적 지지를 잃었고, 조순형은 탄핵 역풍에 책임을 진다며 자신의 지역구를 버리고, 대구 수성갑에 출마했지만 3위에 그쳤다. 탄핵과 지역주의, 두 개의 파도를 동시에 맞은 셈이었다.
정치적 중심에서 밀려난 조순형은, 마지막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여권도, 야권도 아닌 길. 실용주의 정치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4. 이회창과 손잡다 - 보수진영으로
2006년 재보궐 선거에서 성북을에서 다시 국회로 복귀한 조순형. 하지만 2007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인제에게 밀리자 당을 떠났다. 이후 대선에 출마한 이회창과 교감하며 자유선진당 창당에 참여, 상임고문이 된다. 이는 평범한 탈당이 아니라, 민주당 계열과의 결별이자 보수 정당으로의 이행이었다.
2008년 비례대표로 18대 국회에 복귀했지만, 그 무렵의 조순형은 과거의 실세가 아니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기록은 원내 최고령 간사. 그리고 정계 은퇴였다.
결론
탄핵, 탈당, 복귀, 은퇴. 조순형의 이름 앞에 붙는 단어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의 정치 인생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무소속으로 시작해 민주당의 중심에 섰고, 끝내 보수 정당에서 정계를 마무리했다. 정당 계보의 변천사를 그의 이름 하나로 훑어볼 수 있을 정도다.
정치에서 일관성만큼 중요한 건 '당시 왜 그 선택을 했는가'다. 조순형은 그 선택의 무게를 온몸으로 떠안았다. 그래서 묻게 된다. 민주당의 거목 조병옥의 아들이라는 태생의 무게, 동교동계 핵심 멤버로서의 당내 위상, 그리고 급기야 보수 진영까지 걸어간 이력.
조순형은 이념과 계보, 지역과 계파를 가로지르며 정치의 경계를 흔들었다. 이 모든 것을 감당한 채 자신만의 궤적을 남긴 정치인 그런 인물이 다시 등장할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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