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풍군은 왜 갑자기 '임시세자'가 되었나
조선 후기, 정식 왕세자도 아닌 인물이 궁궐에서 세자와 같은 대우를 받고 '가동궁(假東宮)'이라 불린 일이 있었다. 이 특이한 일의 주인공이 바로 완풍군 이담이다.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장남이긴 했지만, 종친으로서 평범하게 지내던 그가 왕실의 후계자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궁궐 내부에서조차 세자처럼 문안을 받고, 외부에서는 조선의 후계를 이을 인물처럼 여겨졌던 그 배경에는 단 한 사람, 홍국영이라는 권신의 의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홍국영의 권세가 만들어낸 유력 후계자
완풍군은 영조의 증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장남이었다. 종친부 규정상 군호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은 되었지만, 실제로 봉작을 받지 않고 성장한 평범한 종친이었다. 그런데 1779년, 홍국영이 죽은 여동생 원빈 홍씨의 양자로 상계군을 들이면서 상황이 바뀐다.
홍국영은 완풍(完豐)이라는 봉호를 정했다. 이는 왕실의 본관 '완산'과 홍씨 집안의 본관 '풍산'에서 한 글자씩 따온 이름이었다. 작위 이름부터가 홍국영의 욕망을 품고 있었던 셈이다.
이후 이담은 궁궐에서 동궁처럼 대우받았고, 조정 내에서는 '임시세자'로 불리기까지 했다.
사실정조는 당시 만 28세로, 후사를 얻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나이였다. 자식이 없던 상황이긴 했지만, 충분히 후궁을 들여 자손을 볼 수 있었기에 당장 후계 문제를 논의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홍국영은 조카를 정조와 원빈 홍씨의 양자로 만들고, 다른 후궁을 들이는 것도 방해했던 것이다. 홍국영의 이런 행동은 정조의 후계 때문이 아니라, 홍국영의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왕권을 등에 업은 권신의 욕망이 만들어낸 비정상적인 후계 구도였던 것이다.

홍국영 실각과 완풍군의 몰락
홍국영은 정조 즉위 초기부터 실세로 군림했지만, 점차 그 권력이 도를 넘는다는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원빈 홍씨의 예우 과잉, 완풍군을 후계자로 만들려는 시도, 그리고 정조의 사생활에까지 간섭하는 언행이 문제로 지적됐다.
정조 역시 점차 홍국영의 권세를 부담스럽게 여기게 되었고, 내부 비판이 쌓이면서 1780년대 초반 홍국영은 정계에서 밀려나기 시작한다. 결국 홍국영이 실각하면서 완풍군의 지위도 순식간에 무너졌다.
정조는 완풍군을 파양시켜 봉호를 다시 '상계군'으로 바꾸고, 이름도 이담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이후 상계군은 조정과 종친 모두의 견제를 받았고, 궁에서 지낸 시절의 방종한 행적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1787년, 상계군은 음독으로 생을 마감했다. 혼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독살설도 떠돌았다. 아버지 은언군이 상계군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정조의 아이를 밴 후궁(의빈 성씨)을 해쳤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로 인해 집안 전체가 역적으로 몰릴 위기에 처하자 오히려 아들에게 독을 강요했다는 주장도 있다.
죽은 뒤에도 논란은 이어졌다. 외조부 송낙휴의 고변으로 상계군은 반역 음모의 중심 인물로 지목되었고, 관련자들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과거 완풍군 시절의 행적을 문제 삼아 '역적 담'이라는 표현을 공식 문서에 쓰도록 했다. 이후 상계군의 이름과 존재는 사실상 금기어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1849년, 혈연상 이복 조카였던 철종이 즉위하면서 상황은 바뀐다. 상계군은 복권되었고, 과거의 봉호와 품계도 일부 회복되었다. 하지만 그의 묘소는 옮겨진 뒤로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고, 역사 속에서도 완풍군과 상계군이라는 이름은 오래도록 지워진 채 남게 되었다.
결론
완풍군 이담은 홍국영이라는 권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이었고, 그 권력이 무너질 때 함께 사라진 존재였다. 이름도, 무덤도 희미해졌지만 완풍군은 조선 정치가 권세가에 의해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세도정치의 운영 방식과 권신 중심 정치 구조를 미리 보여준 선례라는 점에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완풍군은 조선 후반 세도권력의 민낯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지 예고한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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